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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음향학, 혹은 작곡 권리로서의 오디오 복제(Plunderphonics, or Audio Piracy as Compositional Perogative) – John Oswald

Posted in music by ntrolls on November 23, 2010

Girl Talk라는 매시업 아티스트All Day 앨범이 최근에 화제가 됐다. 앨범에 사용된 샘플 전체의 리스트가 이미 위키피디아에 올라와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양이 엄청나다. 이 음원 다운받느라 인터넷 전체가 느려졌다는 둥 하는 소식이 올라오는 가운데, 막나가는 음악/서브컬쳐 블로그 Illogical Contraption에서 John Oswald라는 전위 작곡가의 작품을 소개했다. John Oswald의 음악은 매시업으로 새로운 멜로디를 만드는 귀여운 작업이 아니라 아니라 샘플을 노이즈 수준까지 밀어붙여서 청자가 히트한 대중음악을 인지하는 기제가 과연 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이다. 듣기엔 상당히 고역일 수 있는데, 의외로 정신나간 라디오가 쏟아내는 것 같은 분절된 음원들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을 “아 저건 이 곡이고”하고 인지하는지 스스로를 살펴보면 깜짝 놀라게 되기도 한다.

85년도에 John Oswald가 작곡을 위해 샘플링을 사용하는 행위에 대해 발표한 선언적인 에세이를 한글로 옮겨봤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링크된 사이트에서 “P”를 누르면 뜬다). 원문도 길이가 꽤 되지만 주석도 만만치 않게 붙어있는데, 미국 저작권법 세부와 관련된 사항 등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원제이자 John Oswald의 웹사이트 제목은 plunderphonics는 “약탈음향학”이라고 옮겨봤다. 간간히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주를 붙이고, 가능한 한 위키피디아와 유튜브의 연관 페이지로 링크를 추가했다.


“약탈음향학(Plunderphonics) 혹은 작곡 권리로서의 오디오 복제”

– 존 오스왈드(John Oswald), Wired Society Electro-Acoustic Conference, 토론토, 1985.

악기는 소리를 생산한다. 작곡가는 음악을 생산한다. 악기는 음악을 재생산한다. 녹음기, 라디오, 디스크 플레이어 등등은 소리를 재생산한다. 태엽을 감는 뮤직박스는 소리를 생산하고 음악을 재생산한다. 음반을 전자 빨래판처럼, 바늘을 기타 픽업처럼 사용하는 힙합 아티스트에게 주어진 턴테이블은 고유한 소리를 (재생산이 아니라) 생산한다: 턴테이블이 악기가 되는 것이다. 악기를 변형하는 샘플러, 즉 녹음 행위(recording)는 기록 도구인 동시에 창작도구이며 따라서 저작권에 의해 명시된 둘 사이의 구분을 약화한다.

공짜 샘플(Free samples)

장안의 화제인 이 새로운 디지털 사운드 샘플러들은, 듣자하니 어찌나 완벽한 모방의 도구인지 오케스트라 전체의 사운드는 물론 기침소리, 비명소리까지 재현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 우리 문화에서, “샘플(sample)”이라는 단어는 종종 “공짜(free)”라는 형용사를 앞에 달고 등장한다. 나는 이 점을 바탕으로 허용 가능한 청각적 모방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내 생각을 두서없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아마 여러분들 중 현직 혹은 미래의 샘플리스트(samplerists)들은 다른 사람의 음향 창작물(sonic manisfestation)을 구성하는 재료를 어디까지 합법적으로 빌려올 수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음악적 자산은 개인 소유인가? 만약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무단침입을 할 것인가? 여러분도 나처럼 이스트먼 로체스터 오케스트라의, 절판된 지 오래된 Mercury Living Presence LP에 수록된 찰스 아이브즈(Charles Ives)의 3번 심포니[1](이 곡 자체가 허락없이 많은 요소를 차용하고 있지만)으로부터 잘 녹음된 특정 코드를 하나 따오기를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여러분이 만든 에뮬레이터(역자주: e-Mu Systems에서 나온 샘플러) 콘체르토 중 펑키한 섹션 위에다 시대착오적인 피그미족의 합창 소리(원시문화를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를 얹으면 어떻게 들릴까 궁금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는 그저 Mirage(역자주: 샘플러)에 딸려온 사운드 라이브러리에서 딸국질 소리 한 옥타브를 따서 Mellotron 2(역자주: 멜로트론은 자기 테잎을 이용한 일종의 기계식 샘플러)의 테잎에 얹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지도 모른다.

작곡에 영감을 주는 청각적 재료가 간혹 그 자체로 작곡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피아노는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 1655-1731)의 음악적 창작물인가, 아니면 베토벤과 그 동료들이 음악의 나라를 탐험할 수 있도록 바르톨로에 의해 공학적으로 설계된 도구일 뿐인가? 일부 유명한 곡들은 당대의 디지털 녹음기, 그러니까 뮤직박스를 위해 특별히 작곡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시퀀서/신디사이저들에 포함된 프리셋 사운드는 공짜 샘플인가 아니면 제조사의 소유물인가? 멜로디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음색은? 영감을 오직 천상으로부터 얻는 작곡가라면 이처럼 겹겹히 쌓인 기계적 발명품들의 저자들에게 빚을 안지고 창작할 수도 있을테다. 하지만 그처럼 축복받지 못한 나머지 우리들은 어쩌란 말인가?

소위 지배권력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 ‘작가(author)’는 종류를 막론하고 창작자를 일컫는 저작권 용어이다 – 소프트웨어를 작성하는 프로그래머이든, 하드코어 음악을 쓰는 작곡가이든 상관없다. 저작권법에 따르면 ‘작가는 작가의 명성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일체의 변질, 훼손 또는 여타의 변형을 막아서 작품의 존엄성을 보존하고 저작권을 주장할 권리를 가진다.’ 이 구절은 캐나다의 저작권법 “작품의 존엄성”

공테잎은 derivative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미 76년에(토마스 에디슨이 축음기 사업을 시작한 지 99년 만이었다) 음향 녹음을 보호하는 미국 저작권법이 최초로 등장했었다. 그 이전에는 오직 (역자주:악보에) 기록된 음악만이 보호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람이 눈으로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음악은 보호받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은 녹음 자체는 예술적 창조물이 아니며 “다만 물리적 사물을 통한 창조적 작품의 사용 혹은 활용”에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일부 음악 관련 단체들은 아직도 이 견해를 고수한다. 미국의 I909 조항에 비하면 전자적으로 수억년 전(1924년)에 만들어진 현 캐나다 법안에 따르면 “저작권은 음반, 천공 테잎 혹은 그 외 음향을 재생하는 기계장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기계장치의 성능이 20세기가 시작할 무렾에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만큼 발전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한데 저작권법의 작성자들에게 있어 진정한 골치거리는 디지털 샘플러와 그의 지루한 사촌형제인 컴퓨터를 포함, 온갖 종류의 전자장치들이다. “전자적/생물학적/명문적 통신매체가 배출하는 온갖 친숙한 문화적 배출물 중”에서 이른바 전자 두뇌 사업은, 아마도 상대적으로 젊기 때문에, 선구자적인 창조성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숨겨진 천재성을 키워내고 있다. 컴퓨터 절도 음모는 영화와 범죄소설의 인기 소재가 되는 반면 음악을 훔치는 행위는 초보적인 좀도둑질 혹은 그저 길을 좀 잘못 든 순진함 정도로 치부된다. 이야기의 구조도 단순하다: 디즈니가 소비자들이 허가없이 쥐(역자주: 미키마우스)를 복제하는 것을 요인했다고 소니를 고발한다. 전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이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음률을 사용하는 실수를 저질러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8].

“집에서 듣기 위한 복제”를 둘러싼 논쟁은 실은 기초적인 창조성이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구하다. 수십년 간 이미 완성된 음악 패키지의 수신자로만 남아 있던 일반 청중이 드디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진정 즐기는 음악과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만들어진 곡을 구분해서 자기만의 선집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청자들은 온 세계로부터, 혹은 적어도 자기가 가진 음반 컬렉션이 허용하는 범위로부터 음악 산업이 제공하지 못하는 다양성을 충족시키는 컴필레이션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갇혀서 길러지는 아티스트, 그리고 점차 죄어오는 만인을 만족시키는 공통 분모만이 장사가 된다는 정책에 갖힌 음반업계는 이런 다양성을 공급할 수 없다.

치프턴스/해리슨 사건(역자주: 미국 밴드 치프턴스가 조지 해리슨의 히트곡 My Sweet Lord자신들의 멜로디를 표절했다고 주장한 소송사건, 결국 조지 해리슨이 ‘무의식적으로’ 멜로디를 표절했다고 판결되어 해당 싱글의 수익금 대부분을 치프턴스에게 지불했음), 그리고 멜로디의 독창성에 대한 일반적인 의무사항을 고려해보면, 마치 에디슨이 만든 원통(역자주: 축음기의 초기 형태)에 대한 특허를 두고 벌어진 싸움과 비슷한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소음 장사

오늘날 음악산업이 취급하는 위태위태한 상품은 “노래”가 아니다. 음악팬들은 특정 히트곡을 100분의 1초만에 – Fairlight 신디사이저가 “딕시랜드”를 연주할 수 있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 인지할 수 있다. 리듬과 음정에 의해 정의되는 각각의 음표는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상업적인 화성에 있어서 사소한 요소밖에 되지 않는다. 애초에 악보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팝 뮤지션이 드물다. 아트 오브 노이즈(The Art of Noise)같은 밴드는 대중시장을 겨냥한 스튜디오 기반의 녹음 공장이다: 이들은 무한반복되는 비트 위에 무조성의 음색을 엮어나간다. 장사는 에뮬레이터(역자주: e-Mu Systems에서 나온 샘플러)가 한다. 자기 곡을 가진 가수들 역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멜로디가 어떤 모양새인지 연구하기보다는 브루스랑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데에 더 주력한다. 한데 이렇게 “소리”를 베끼는 것은 합법이다. 예능인들의 권리단체는 작곡가와 작사가들은 보살펴주지만 실제로 음악이 구성되는 데 기여하는 리듬/음색 창조자와 믹싱 아티스트에게는 작곡에의 크레딧이 주어진 적이 없다.

대중음악계의 정반대편, 학자들과 테크니션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페르마타와 64분음표가 “음악”의 정의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가 만연하다. 한데 진지한 작곡가들마저도 이제는 음표를 그리는 수고는 왠만해서는 하질 않는다. 물론 외모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컴퓨터 프로그램과 프린터를 이용해 오선지를 출력할 수 있긴 하지만.

음악의 언어는 방대한 양의 문장부호를 포함하고 있지만, 문학에서 이용하는 인용부호 (” “)는 빠져있다. 잘 알려진 곡의 박자를 바꿔 즉흥연주를 한다고 해서 재즈 연주자가 – 강사들이 종종 하는 것처럼 – 두 손을 허공에 뻗어 자기 연주가 “인용되었다”는 표시를 하는 일은 없다. 대부분의 악기에 있어서 이런 행위는 기술적인 어려움을 내포하기 때문일 것이다 – 예를 들어 트럼펫을 바닥에 떨어뜨린다던지.

인용부호 없이는 의도적인 인용을 표절과 사기로부터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음표를 베끼는것은 일반적인 표절의 관행에 있어 일부에 불과하다.

내가 멜로디 작곡을 과소평가하는 것 아니냐고? 내 생각에는 머지 않아 다이아토닉 스케일로 듣기엔 좋지만 뻔하디 뻔한 멜로디를 무한히 조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나오고, 작곡가는 그 중에서 취사선택만 하게 될 것이다. 멜로디가 이미 사용됐는지 아닌지 체크해주는 기능이 들어가서, 조지 해리슨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11].

소리의 키메라

제조사들이 전통적으로 테잎 레코더의 기능을 원본을 충실하게 복제하는 것으로 제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작곡가들은 오래 전부터 녹음기를 악기로 사용해왔다. 테잎 레코더의 디지털 버전과 함께 이제는 “청각적인 악기”와 “소리의 재현”을 아우르는 혼성(hybrid) 기기들이 등장했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소리의 재현은 별로 새로운 기술도 아니다: 19세기부터 이어져 온 비올라노-비르투오조(Violano-virtuoso)오케스트리온(Orchestrion)같은 괴물같은 기계장치들은 본질적으로 싱클라비어 디지털 뮤직 시스템(Synclavier Digital Music System)이나 패어라이트 CMI(Fairlight CMI)와 유사하다. “멀티트랙 녹음실 + 가상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광고하는 싱클라비어는 꼭 아코디언 코드판과 LED 라디오가 장착된 피아노처럼 보인다.

작곡가가 풀잎을 뽑아 손 안에 끼우고 이를 떨림판으로 이용한다면 (비록 “이미 누가 했잖아”라는 비난을 받을지는 몰라도) 기존의 기술적 진보를 모조리 뛰어넘어 자연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 될테다. 해리 파치(Harry Partch)휴 르케인(Hugh LeCaine)같은 이들이 내놓은 우상파괴적인 작품마저도 악기와 작곡행위 사이에 구분을 둔다는 점에서는 통상적인 음악과 다를 바가 없다. 소리를 내는 도구 – 이호(역자주: 중국 현악기)든 에뮬레이터든 – 는 전통적으로 너무나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을 지녀왔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자체로는 음악적 기호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무 특징 없는 연주 음악 (“101개 현악기의 다양한 멜로디”라던지 “연인들을 위한 피아노”, 혹은 “트럭운전사들을 위한 DX-7” 등등)이 얻는 인기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다.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들, 특히 요즘 종종 보이는 미리 프로그램된 리듬박스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J.S. 바하는 “정확한 때 정확한 음표를 눌러주기만 하면 모든 악기는 스스로 연주한다”고 했다. 소리의 생산자와 재생산자 사이의 구분은 모호하고, 적어도 존 케이지가 40년대에 라디오를 악기로 이용한 이래 쭉 새로운 음악적 창작의 장으로 열려 있었다.

바닥부터 시작하기

소리의 생산과 재생산 기술 모두가 점점 상호작용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다시 한 번 청자들이 (설사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일지는 모르지만) 창작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다. 청자들의 이 권리는 지난 수십년 간 잊혀져 있었다. 이제는 원시시대가 된 “음반을 듣는 세대”는 수동적인 존재였다(능동적으로 음반을 스크래칭하는 행위는 포스트-음반, 블라스터/워크맨의 시대에 속한다). 거실에 놓인 피아노를 실제로 연주하며 음악을 즐기는 시대는 지나갔다.

컴퓨터 덕에 아마츄어들은 전문지식 없이도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요즘의 음악 소프트웨어들은 버벅이는 초보자에 맞춰서 자동으로 박자를 늦추고 가장 어울리는 코드를 골라준다. 일부 소비자 레벨의 오디오 기기들은 뜻하지않게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조사들은 아마추어 수준의 장비와 프로 수준의 장비 사이에 호환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수동성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제는 고급형 스테레오 카세트에서 거의 퇴화되어 사라진 마이크 입력단자를 보라[12].

청자로서 나는 (역자주: 그냥 듣기보다는) 실험을 선호한다. 내가 가진 오디오 시스템에는 리시버 대신 믹서가 장착되어 있고 다양한 속도의 턴테이블, 필터, 역재생 장치등이 포함되어 있다. 귀 한 쌍과 함께.

능동적 청자는 음악의 거시적 구조를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작품의 재생 속도를 높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세부적인 음색을 좀 더 세밀히 관찰하기 위해서 속도를 늦출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작품의 일부분을 나란히 병치하거나 혹은 동시에 재생함으로써 “파리에서 녹음된 세네갈풍 타악기 연주에서 인도 라가의 모티프를 찾거나, 50년대 헐리우드의 이국적인 관현악(마치 모나리자처럼, 크게 확대해보면 타지마할의 작은 再現像으로 구성돼 있는 음향의 텍스쳐)으로부터 잊혀진 장면들의 모자이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2차대전 중 존 케이지가 타악기로서의 피아노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있을 무렵, 트리니다드인들은 버려진 기름통이 (사람들을 선동할까봐 금지된) 그네들의 전통적 타악기를 쉽고 저렴하게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틸드럼은 결국 국가적 자산으로 발전했다. 한편 80년대 미국에서는, 아마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스크래칭(scratching)과 덥(dub)이 게토에 침투해 들어갔다. 환경에 의해 강제된 제한된 사유재산 목록 내에서라면 이동식 디스코 시스템도 기타(guitar)를 훨씬 넘어서는 민속음악(folk music)적 잠재력을 지닐 수 있다. 전당포에서 가져온, 혹은 훔쳐온 전자기기에 사용자 가이드가 따라왔을 리 만무하니 “이 블래스터(blaster)는 수동적 재현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는 안내문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이런 기기에서 발견된 어떤 종류의 공연 가치(performance potential)도 즉시 활용되었다. 음반은 전기 빨래판처럼 연주됐다. 라디오와 DJ들이 서로 다른 녹음된 음악을 겹겹히 쌓아 동시에 재생했다. 공중파를 통해 권위를 가지고 방송된 음악은 복제되고, 장식되고 또한 조작되었다.

미디엄은 자성(磁性)을 지닌다

밀튼에 따르면 표절은 “빌려간 이가 작품을 더욱 향상시키지 못할 경우” 발생한다. 스트라빈스키는 여기에 소유의 개념을 더했다: “좋은 작곡가는 모방하지 않고 훔친다.” 빌려간 이가 작품을 향상시키는 좋은 예의 하나는 짐 테니(Jim Tenney)“콜라쥬 1(Collage 1, 1961년)”이다: 이 작품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 “Blue Suede Shoes” (엘비스부터도 칼 퍼킨스의 곡을 빌려왔지만)을 변속 테입 레코더와 면도날을 이용해 변형한다. 삐에르 샤퍼(Pierre Schaeffer)가 (많은 것을 연상시키는) 발자국 소리같은 영화의 효과음으로부터 음악적 가능성을 보았듯이, 테니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음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듣게 한다. 동시에 그 곡에 담긴 모든 본질적인 “엘비스스러움”은 우리가 테니의 작품을 인지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미국과 캐나다의 저작권 법은 사전 허가 없이 남의 작품을 가져다 쓰는 행위가 합법적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각각 공정한 사용(Fair use)과 공정한 거래(Fair dealing)라는 이름을 붙인다. 교육적인 예제로서, 혹은 비평의 목적을 위해 음악의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합법적인 공정한 사용례로 인정된다. 공정 거래라는 명칭은 원작의 경제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사용을 전제한다.

경제적 권리에 더해서 저작권법에는 도덕적인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캐나다 저작권법의 최근 개정안은 도덕적 권리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아티스트는 자기 작품에 대해 일정 정도의 도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엘비스의 가족들은 작품의 복제에 대한 권리 그리고 “특정 아티스트 고유의 사운드가 가지는 중요성 및 대중들로 하여금 원작자의 예술적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지도 모르는 더 열등한 비공인 아티스트의 녹음에 의해 훼손될지도 모르는 원작자의 독창성”을 보호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현재 캐나다에서는 원작을 이용해 독립적인 변형물을 만드는 것이 허용된다. 캐나다 저작권법의 17징 2조 b항은 “작품의 저작권을 소유하지 않는 아티스트가 원작을 이용해 추가적인 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나중에 만들어진 작품이 그 전체로서 원작의 제작의도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허용된다”고 밝히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테니의 “Blue Suede”는 밀튼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고 스트라빈스키의 경구에 들어맞는 것은 물론 엘비스의 도덕적 권리나 캐나다 저작권법의 17장 2조 b항을 어기는 것 같지도 않다.

청각적 야생

기존에 녹음된 재료를 재활용하는 것은 거리의 뮤지션들 혹은 일부 소수 괴짜들에게만 국한된 행위가 아니다. 허비 행콕의 “RockIt”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기타코드는 스튜디오에서 뮤지션이 녹음한 것이 아니라 레드 제플린 음반에서 바로 샘플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허비 행콕의 후속작인 “Hard Rock”에는 마이클 잭슨이 등장한다. 건반 주자들의 악기에 이런 류의 재생을 가능하게 하는 버튼이 자리를 잡은 이상, 오실레이터를 이용해 사운드를 만들기 보다는 (역자 주: 음파로부터 소리를 만드는 초기 신디사이저를 지칭) 이 버튼을 더 쉽게 누르게 될 것이다. 이 연주자들은 손가락으로 복제된 사운드를 이용하는 데에 이미 익숙하다: 예를 들어, 음색을 따온 곡의 이름이 스탑(stop – 역자주: 특정 음역대의 오르간 파이프 묶음)에 적힌 오르간의 경우처럼.

그러니까, 이미 장비도 나와 있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음악을 복제하고 있다 – 뻔뻔하게든 아니던간데. 멜로디가 안써진다고 밤에 잠 못잘 필요 없다(잠의 중요성은 Tartini를 보면 알 수 있다 – 역자주: 꿈에서 악마를 만나 영감을 얻었다는 이탈리아 작곡가 쥬세페 타르타니의 “악마의 트릴 소나타”를 가리킴). 보아하니 모방을 하더라도 법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좀 있는 것 같다. 이제 우리 모두, 찰즈 아이브즈가 그랬던 것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는 음악들 중 어느 곡이든 골라잡아 기꺼이 뻔뻔하게 베껴도 좋은 것일까?

아이브즈는 대부분의 음악이 공공영역(public domain)에 존재하던 시절에 작곡을 했다. 요즈음에 와서는 공공영역의 범위가 법적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나라에 따라 기간은 다르지만 현재로부터 일정 기간 떨어진 과거의 작품에만 적용이 된다. 아이브즈의 작업 방식을 따르자면 우리는 그가 살던 시대에 “현재”로 여겨지던 오래된 곡들만을 베껴올 수 있을 것이다. 공공영역에 속한 음악은 여전히 인기가 높을 수도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작곡가가 더 이상 권리 – 혹은 로얄티 지급 – 을/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이미 만들어져있는 히트곡인 셈이다. 혹은, “음악 산업(The Business of Music)”이라는 책에 따르면 “공공영역은 막무가내 채취를 막을 경비원도 없고 길읽은 여행자를 안내할 가이드도 없는 거대한 국립공원”과 같으며 “명확히 안내된 도로 심지어는 경계도 없어서 속절없는 방문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웃하는 사유지를 침범한 나머지 고소를 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곳이다.

음악적 부동산의 전문가들은 저작권법의 법망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또 피하기 위해 로비를 벌여왔다. 반면에 많은 예술가들에게는 울타리는 없지만 마치 학술 세계처럼 “감사의 말”은 존재하는 음악 세계로야말로 창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거대한 벌이 웅웅대는 소리

예술가의 권리를 설명하게 위해 부동산의 비유를 들다 보면 인쇄와 대중에게의 보급이라는 개념에 와서 막히게 된다. 계속되는 히트곡 행진은 마치 공개 장소에서 벌어지는 팝뮤직의 행진과도 같다. 그렇다면, 궁금증에 가득찬 관광객의 입장에서, 우리 모두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스스로 기념사진(“타지마할의 작은 再現像…”)을 찍을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념품 가게에서 공식 엽서와 프로그램만 구입할 수 있는 것 대신 말이다.

모든 대중 음악 (그리고 그 정의상 모든 민속 음악)은 법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공공영역에 속한다. 팝뮤직을 듣는 것은 선택적인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팝뮤직은 우리들 위에 쏟아져 내린다 – 가장 교활하게는 베이스라인만 걸러진 채로 아파트 벽을 넘어서, 혹은 행인들의 머리 위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그러하다. 사람들 모두가 전반적으로 예전보다 더 많은 양의 소음을 생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총체적 소음을 예전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 사람 – 수백만와트짜리 PA 시스템, 트리플 플래티넘, 그리고 라디오에서 줄창 틀어대는 히트곡을 가진 사람 – 의 수는 줄어들었다. 이를 무시하기는 힘들고 따라하자니 별 의미는 없다. 어떻게 해야 수동적인 청취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일단 그 위치가 파악된 뒤, 대서양 바닥에 가라앉은 타이타닉호를 어떻게 인양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Deep Emergence 연구소의 해양학자 밥 발라드는 이렇게 말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시각화장비를 동원해서 X라 때리는거죠”.


원저자 각주

1. Mercury SR90149. 음반에 있어 (청자에 반하는 개념으로서의) 사용자 접근성은 복잡한 문제이며, 여기에 대한 해답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미국의 경우 72년 이전에 행해진 녹음은 연방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 일반법 및 표준 복제방지법의 보호를 받기도 한다. 교향곡 3번은 1947년 Arrow Music Press에 의해 출판 및 저작권 등록이 되었다. 저작권이 작곡가가 아닌 출판사에 귀속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아이브즈가 자기 작품의 저작권을 포기하고 자기 음악이 최대한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는 것을 바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자기 음악을 직접 출판해서 무료로 보급했다. 114개 작품에 붙인 후기에서 그는 음악의 소유자를 “온건한 대여자(gentle borrower)”라고 지칭했다. 이 무료 음악에 이어, 아이브즈는 자기가 모든 비용을 댄다는 조건을 붙인 다음에야 정기간행물인 New Music에 자기 음악을 싣는데 동의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New Music은 관행대로 4번 교향곡에 아이브즈의 이름으로 저작권을 명시했는데 이것을 발견하고 아이브즈가 대로했다고 한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화가 난 채, 지팡이를 휘두르며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누구든 복사하길 원하면 할 수 있다고! 누가 이걸 베끼든 다시 재게(再揭)하던 관계 없단 말일세. 이 음악은 돈 벌려고 만든 게 아니라 알려지고 들려지기 위해서 만든 거야. 내가 왜 개인적인 법적 권리 따위로 그 음악 고유의 인생에 간섭한단 말인가?”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펴낸 헨리 & 시드니 코웰作 “찰스 아이브즈와 그의 음악”[1955]에서 발췌, pp121-122). 말년에 아이브즈는 자기 작품이 상업적으로 출판되는 것을 인정하기도 했지만, 로열티는 언제나 다른 작곡가가 받도록 했다.

아이브즈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철학을 높이 샀다. 에머슨은 “인용과 독창성”이라는 에세이에서 “단어에 대한 기억력이 좋기만 하다면, 사람은 스스로 말을 지어낼 필요가 없다. 당신이 나에게 빚지는 것은 내 생각이며, 설사 표현을 바꿀지라도 나는 내 생각을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생각으로부터 당신이 새로이 말하는 것은, 나에게 자연의 어떤 작품에나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예견된 놀라움(expected unexpectedness)을 선사할 것이다.”

8. 조지 해리슨은 “My Sweet Lord” (1970)에서 Chiffons의 62년 작 “He’s so fine”을 표절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스파이더 로빈슨(Spider Robinson)은 가상의 소설 Melancholy Elephants에서 강력한 저작권법이 지배하는 사회의 득과 실을 그렸다(역자주: 전문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소설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50년 후로, 전세계의 인구가 크게 증가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120세 이상 사는 사회이다. 작곡가는 인기있는 직종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저작권의 기산을 무한대로 늘리려는 법안에 반대해 싸우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로빈슨이 그리는 미래 사회에서는, 무슨 곡을 써도 저작권 등기소가 기존에 있던 노래의 변형으로 낙인찍어버리는 바람에 작곡이 어려운 행위가 되어 있다. 조지 해리슨 사건이 중요한 판례로 언급된다. 80년대 후반 무렵 법원에서 표절대란이 벌어진 이후 작곡가들은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다. 20세기 말 무렵에 Brindle의 Ringsong이 Corelli의 콘체르토를 표절했다는 판결이 나면서 표절대란은 절정에 이른다.

로빈슨은 현재 주류를 이루는 작곡 기법을 따를 경우 조합 가능한 멜로디의 갯수는 많지만 무한하지는 않다는 점을 (역자주: 소설 안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예술가들은 수백년동안 스스로가 뭔가를 창조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있다. 사실 예술가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며 다만 “발견”(강조는 역자)할 뿐이다. 자연계에는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쾌감을 주는 몇몇 음표의 조합이 전해내려온다. 수천년동안 우리는 자연계에 숨겨져있는 이 조합들을 발견해오면서 스스로에게는 우리가 멜로디를 “창조했다”고 거짓말을 해왔다. 창조한다는 것은 무한을 암시한다. 나는 인류가 창조자가 아니라 다만 발견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면 별로 좋은 반응을 보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소설 중 페이지 16)

11. 비틀즈, 특히 조지 해리슨은 공정한 사용과 개인적인 부의 축적이라는 두 개념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재미있는 예를 보여준다. 폴 매카트니는 “우린 둘도 없는 도둑이었다. 표절대마왕이랄까” (Musician, 85년 2월호 페이지 62)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국가도 몇 곡 포함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음악 카타로그의 주인이다. 존 레논은 “Revolution 9“같은 곡에 무허가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녹음한 소리의 루프를 집어넣었다. (역자주: “My Sweet Lord”는 어땠는지 몰라도) 조지 해리슨의 LP “Electronic Sound“는 분명 “무의식적으로” 표절한 게 아니다. 이 앨범은 전자음악가 버니 크라우제(Bernie Krause)가 새로 나온 무그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만든 데모 테잎을 그대로 실은 것 뿐이기 때문이다.

크라우제가 말하길: “조지 해리슨에게 내가 전혀 크레딧과 로열티를 못받아도 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답하길 자기를 믿으라며, 말론브란도처럼 협박하지 마라, 내 이름이랑 나란히 실리기만 해도 네 경력에 도움이 크게 될거다, 판 팔리면 돈 좀 쥐어주마 그러더군요.” 앨범에 발표됐을 때 조지 해리슨의 이름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지만 크라우제의 이름은 조그맣게 감춰져 있었다.

12. 가정용 카세트 녹음기에 달린 일시정지 버튼은 실시간으로 음악을 편집하고 꼴라쥬하는 데 사용된다. 그 결과 다양한 카세트 덱에 달린 서로 다른 종류의 일시정지 버튼이 가지는 특징에 대한 일종의 애호가들이 등장했다. 버튼마다 눌렀을 때 소리가 편집되는 양상이 다르며, 일부 버튼은 다른 종류의 버튼에 비해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작동한다. 작곡가들 중에는 이제는 단종된 지 오래된 소니의 TC153~158 모델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니의 일반 소비자용 디지털 녹음기에 얽힌 뒷이야기는 아마츄어/프로 장비 사이의 틈새를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한 좋은 예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PCM-F1 디지탈/아날로그 컨버터는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려는 사람들보다는 프로들이 더 많이 구입했다. 훨씬 비싼 프로 장비와 호환이 됐고 사실상 대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소니는 F1을 단종시키고 더 무겁고 마이크 입력단자가 없는 701E 모델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701E 모델을 스튜디오용 컨버터로 개조해서 사용했다. 결국 소니는 그마저도 단종시키도 스튜디오 환경에서 대체로 사용이 아예 불가능한 501E 모델로 전환했다.

#RATM4XMAS

Posted in music by ntrolls on December 19, 2009

Love Actually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크리스마스 주간에 싱글차트 1위를 누가 하느냐는 영국에서 나름 중요한 이슈다. 한데 지난 몇 년 간의 트렌드를 보면 크리스마스 직전 쯤에 우승자를 발표하는 리얼리티 탤런트 쑈 X Factor가 차트를 휩쓸었었다. 굳이 X Factor에 출연한 경쟁자들 뿐 아니라, 매 주마다 결과 발표할 때 등장하는 게스트들이 광고효과를 톡톡히 누리면서 차트를 죄다 점령하다시피 하는 것이다. 당장 이번 주만 해도 싱글차트 1위부터 11위까지는 X Factor 출연자 혹은 게스트로 출연했던 아티스트들이고, 앨범 차트 1위는 X Factor 심판이자 Girls Aloud 멤버인 Cheryl Cole의 솔로 데뷔앨범이다. 이 엄청난 상업적 드라이브의 뒤에는 물룐 X Factor/American Idol 뒤에 서 있는 제작자 Simon Cowell이 있다.

American Idol에서 독설로 유명한 이 아저씨, 다른 건 몰라도 상업적인 음악이라는 측면에서 최소한 정확한 감각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X Factor 심판 하다가 상업성의 도가 지나쳐서 이미지 완전히 구겼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려는 크리스마스 싱글차트 탈환작전도 이 사건때문에 시작된 바 크다. John & Edward라는 십대 쌍둥이 듀오(동영상: Queen week – “Under Pressure”)가 본선에 올랐는데, 얘네는 정말 노래의 ㄴ자도 모르는 애들이었다. 매 주 랩 비스무레한 편곡으로 떼웠는데, 어린이(?) 팬들의 성원 덕분인지 아니면 X Factor 자체를 꼴도 보기 싫어하는 시니컬한 리버럴들의 변덕이었는진 몰라도 몇 주간 탈락할 기미도 안보이고 승승장구(!)했다. 당연히 Simon은 “너네는 노래도 못하지 않냐”라고 매 주 퉁박을 줬는데, 그러다가 X Factor 특유의 포맷 덕분에 이 쌍둥이 아니면 다른 한 사람 중 어느 한 편을 떨어뜨릴 수 있는 기회가 Simon에게 왔다. 근데 안 떨어뜨린 거다! 뭐라고 궤변을 늘어놨지만, 사실인즉 프로그램 시청률이 얘네한테 달린 것 같으니까 살려준거다. 이 철면피를 뒤집어 쓴 결정을 두고 당연히 말들이 많았다.

그러다 몇 주 전에 Bill Bailey가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띄웠다.

Cowell Must Be Stopped – buy Rage Against the Machine ‘Killing in the Name’ on Dec.13th to prevent another x-factor xmas No.1

나는 당연히 이 아저씨 특유의 농담인 줄 알았다. 한데 조금 지나니까 이게 정말 캠페인이 된 거다. 트위터에는 #ratm4xmas 토픽이 봇물을 이루고 있고 페이스북 그룹은 물론 Kerrang같은 음악잡지는 물론 Guardian에서도 기사를 쓰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Paul McCartney는 “X Factor 우승자인 Joe McElderry한테 무슨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RATM이 정말 1위를 한다면 멋질거라고(“I think that’s a cool aspect, don’t you”) 했다는 기사마저 등장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RATM의 Kiling in the name은 지금 Joe McElderry와 크리스마스 싱글 차트 1위를 놓고 다투고 있다. RATM은 BBC Radio 5와 인터뷰를 하고 Killing in the name을 라이브로 연주했는데, 동영상 마지막쯤에 보면 가사에 beep 처리를 하고 민망해진 아나운서가 Joe 싱글도 사라고 얼버무리는 코메디를 들을 수 있다 :)

과연 누가 이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