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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s Speech가 끔찍한 역사적 왜곡인 이유

Posted in film by ntrolls on February 13, 2011

The King’s Speech가 끔찍한 역사적 왜곡인 이유

–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The Slate, 2011년 1월 24일 (원래 링크했던 가디언 2011년 1월 31일자 Guardian 기사는 Slate 기사를 전제했던 듯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링크를 변경했습니다. Slate 기사의 제목은 다르지만 Guardian에서 실었던 기사 제목으로 남겨둡니다).

The King’s Speech는 분명 웰메이드 필름이다. 영화의 매혹적인 인간 탐구 플롯은 지적인 영화팬들을 끌어당기도록 명민하게 계산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끔찍한 역사 왜곡을 단행한다. 영화에서 캐스팅 실수인 것 처럼 보이는 몇 안되는 배우 중 하나이자, 실제 인물의 얄팍한 패스티시같은 느낌의 티모씨 스팔의 윈스턴 처칠 역할이야말로 좋은 예이다. 영화는 마치 처칠이 말더듬이 왕자 및 왕자비의 일관된 지지자이자, 왕자의 형인 에드워드8세의 퇴위로 벌어진 위기를 정치적으로 해결해보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반면 역사에 따르면 처칠은 – 도저히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될 때까지 – 자만하고 철없고 히틀러 추종자였던 에드워드8세의 측근이었다. 처칠이 이 괴물을 향해 가진 낭만적인 애착때문에 나치즘 및 나치즘과의 협상에 반대하고자 가까스로 규합되었던 세력이 공중분해될 뻔 했다. 미국 작가 윌리엄 맨체스터(William Manchester)는 전기 작가중 처칠을 가장 성인에 가깝게 떠받들었던 사람이지만, “마지막 사자(The Last Lion)”의 해당 챕터에 이르러서는 그마저도 처칠을 영웅으로 받드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좌파/자유주의자 거물들과의 정치적 차이를 잠시 접어두기로 합의함으로써 처칠은 유럽의 파시즘과 공모하려던 네빌 체임벌린에 맞서는 강한 로비집단을 키워내는 데 성공했고, 이 운동은 시민들의 지지 또한 받고 있었다. 이 집단의 이름은 무장과 언약(Arms and Covenant)이었다. 한데 1936년 왕위 이양 문제가 불거지자 처칠은 이 중요한 작업을 팽개친 채 친나치주의자 플레이보이를 왕위에 계속 앉혀놓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고 정계 동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처칠은 (맨체스터에 따르면 필경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로) 하원에 나타나 ‘충성’의 개념이 뭔지도 모르는 사내에게 ‘충성’할 것을 종용하는 앞뒤 안맞는 연설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자산을 상당 부분 날려먹었다. 같은 해에 에드워드8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칠은 에드워드8세가 “이 섬의 왕관을 쓴 군주 중 가장 용감하고 사랑받은 왕으로써 역사에 길이 빛나실 것”이라고 적었다(방향이 잘못 잡히면 처칠의 문체가 얼마나 허황되고 과장되게 들리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처칠이 한 때 스스로를 “영국 국민들에게 히틀러와 간디라는 두 가지 위협에 대해 경고한 외로운 목소리”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하라.)

종국에는 에드워드8세가 어찌나 멍청하고 이기적이고 허영심 강한 인물이었던 탓에 도무지 구해낼 방법이 보이질 않았고, 따라서 퇴위와 관련된 소동은 – 혹은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 지나갔다. 이후 에드워드8세의 존재는 영화에서 힐끔 보여준 그대로였다: 제3제국의 열렬한 추종자인 나머지 왕위를 버리고 선택한 여인 월리스 심슨과 허니문을 독일에서 보냈고, 둘이 함께 히틀러식 경례를 하거나 받는 모습이 사진에 기록되었다. 그의 친구며 측근이라는 위인들로 말할 것 같으면 대부분이 에드워드 메트칼프(Edward “Fruity” Metcalf)와 같은 검은셔츠단 소속 파시스트같은 이들이었다(몇해 전 왕실 전기작가인 필립 지글러가 이 고약한 역사에 손을 대서 조금 미화해보고자 했으나 결국엔 포기했다). 왕위를 넘긴 후 유럽에서 체류하던 기간 동안 에드워드 – 당시엔 윈저공(Duke of Windsor) – 는 히틀러 및 그의 꼭두각시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꺼려하지 않았고, 만에 하나 제3제국쪽으로 힘의 균형이 기울면 스스로 히틀러의 꼭두각시 노릇 혹은 “섭정”을 하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때문에 처칠은 결국 에드워드를 유럽에서 치울 수 밖에 없었고, 관리감독이 더 수월한 바하마 제도 지사라는 한직으로 좌천시키고 만다.

다른 문제는 다 제쳐두고서라도, 역사적 진실을 그렸다면 영화가 관객들에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처칠의 신화를 정직하게 까발릴 수 있게 되는 그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처럼 보인다. 결국 영화는 (현실을 가리기 위해) 렌즈에 바세린 칠을 한 채로 나아간다. 영화는 정치적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새 군주가 심리적인 장애를 극복하기만 하면 브리튼은 처칠과 새 왕을 버킹엄 궁에 받든 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고, 단결과 저항의 메세지를 담은 왕의 연설이 준비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영화는 에어브러시와 바셀린의 도움을 받는다. 챔벌레인은 노동당/자유당 그리고 처칠을 따르는 보수당 의원들을 제치고 그의 친구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의 대부분은 물론 대규모 군수공장까지 넘겨주고 말았는데, 이후에 그는 유례없는 정치적 환대를 받았다. 그가 뮌헨에서 돌아와 헤스턴 공항에 내렸을 때, 정장을 한 왕실 호위대의 차량이 파견되어 그를 버킹엄궁까지 모셨다. 호위대는 챔벌레인을 궁으로 초대하는 조지6세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 “(초대는) 짐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축하를 전하기 위함이오. (중략) 경의 인내와 결단력은 제국 전체 국민의 감사를 받아 마땅하며, 이 편지로 그대에게 따스한 환영의 마음을 전하는 바이오.”

궁에 도착한 챔벌레인은 발코니로 안내되어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왕가 구성원들의 인사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뮌헨에서의 변절 행위는 총리를 통해 의회 승인을 받기 이전에 왕실의 승인을 받은 셈이 됐다. 반대파가 손을 쓸 틈도 없이 체크메이트를 부른 셈이다. 비록 영국에 성문헌법이 없기는 하나, 고래의 전통에 따라 왕가의 승인은 상/하원을 거쳐 승인을 받은 사안에 대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관례이다. 따라서 보수주의 역사학자 앤드루 로버츠가 1994년 발표한 “윈저家와 담합의 역사”라는 에세이에서 동료 학자인 존 그리그를 인용해서 조지6세와 엘리자베스 여왕(그러니까 콜린 퍼스와 헬레나 본햄 카터)이 챔벌레인의 행위를 먼저 승인함으로써 “금세기 영국 군주 중 가장 비헌법적인 행위를 했다”고 비난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왕실 구성원들의 서신과 일기를 들여다보면 나치와의 담합 정책 및 챔벌레인 개인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옅볼 수 있다. 조지 왕의 무서운 어머니는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원의 의원들이 챔벌레인의 변절행위를 지지하지 않았다며 한탄했다. 왕 자신 또한, 이미 나치 군대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깊숙히 그리고 프랑스 남부에까지 진출했던 시점에 와서도 챔벌레인의 사표를 수리하기를 원치 않았다. 왕은 챔벌레인에게 “경은 진정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으며 짐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표하오”라고 적었다. 후임 총리에 대해서 조지6세는 “짐은 물론 할리팩스 경을 추천하오”라고 했다. 결국 조지6세는 왜 그 담합주의자(역자주:할리팩스경)가 부적절한 선택이며, 왜 전시의 연정 정부 대표로 비선출직인 상원의원은 적합하지 않은지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마음을 돌리지 못한 왕은 일기장에 “처칠이 총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라고 적었으며 패배자인 할리팩스경을 맞아 “짐은 그대가 되기를 원했소”라고 위로했다. 기본적인 사료 조사를 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몇 달 안에 영국 왕실은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양의 결혼을 통해 또 한번 리브랜딩/리런칭 과정을 거칠 것이고, “국가적 단결”이니 “민중의 왕실” 따위의 표현이 여기저기 넘쳐날 것이다. 이 사뭇 이상한 독일 왕가가 가진 도덕적 자산의 거의 전부는 그 구성원들이 “영국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한데 사실인즉, 왕실에 만사를 맡겨뒀던들 영국의 빛나는 순간은 아예 오지도 않았을 뻔 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디테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대한 신성모독인데, 보아하니 여기에 조만간 오스카가 만장일치로 세례를 내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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